지금 시기의 불안감과 멘탈 관리에 대해서(수능 경험담)
(선요약)
0. 멘탈이 건강하고 불안하지 않고 의욕이 넘치는 분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다.
1.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과 집착을 내려놓을 필요도 있다.
2.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밥 잘 챙겨먹기).
3. 의욕을 불태우지 말고 그냥 꾸준히 규칙적으로 공부를 하면 좋다.
4. 정작 결과는 여러분의 부정적인 예측과 다르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요즘 시기가 시기인지라 멘탈이 나갔다 망할거 같다 잠이 안온다 뭐 이런 글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뭐 심리학자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개개인의 상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참고하고 도움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관련된 글을 써 보겠습니다. 방금 전에 말했듯 저는 전문가도 아니고 상세한 상황도 모르니 그냥 보기만 하시고 얻어갈 부분이 있으면 얻어가고 아니면 그냥 넘기시면 됩니다.
일단 결론적으로 말하면 불안감을 완전히 없애고 멘탈을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만드는 거? 지금 시기에선 불가능합니다. 일단 수능 끝나야 해요. 저는 정신적인 문제도 결국 주변 환경에서 오는 게 크다고 봅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를 바랄 수는 없겠죠. 그러니 결국 수능 때까지 안고 가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스트레스와 불안감 등의 부정적인 요소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경감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고 해서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관리하냐가 중요할 건데,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반드시 시험을 잘 보고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과 집착을 내려놓고,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까짓거 ㅈ되면 어때'라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저는 원래 넘치는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입니다(반대로 얘기하면, 그런 자극적인 요소가 없다면 권태를 느껴서 아무것도 안하고 극단적으로 게을러지기도 합니다.). 포스코 창립자 박태준이 포항제철소를 착공할 때 직원들을 모아놓고 저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다함께 바다에 빠져 죽자."
저 말은 죽음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저런 폭탄발언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저거 보고 감동받아서 '뭐든지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하면 다 성공한다' 이런 생각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건강한 일반인들을 데려다가 하루에 10km씩 달리기를 1km씩 수영을 시키면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그 사람들은 건강한 몸 상태와 강력한 체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근데 심각한 병에 걸린 중환자를 데려다가 저렇게 시킨다? 금방 죽을겁니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재활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걸 시키면 영구적으로 회복을 못하는 상태가 되겠죠. 멘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지금 의욕이 충분하다면 자신을 몰아붙이는 거, 좋습니다. 다만, 장기간의 수험생활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생기고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내가 목숨걸고 해야지. 못하면 죽는다.' 이런 마인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제가 저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제 경험입니다. 물론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의 표본의 경우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참고하고 도움을 얻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고 1때 일반고를 자퇴했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학교가 싫어서요. 학교 다니기 싫다는 핑계로 학교에서 밥먹고 축구하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이렇게 3년 살다간 진짜로 인생 ㅈ될게 확실해 보이기도 했고, 그만두는 김에 19살에 대학 가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수능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8살에 본 첫 수능에서 언수외(지금 국수영) 다 2등급 나오고, 어차피 나이도 19살인데 못 할 거 없다며 재수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살 8월에 재종 그만두고 독재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공부할 시간 확보하려고요. 수능 시간표 맞춰서 08시 40분부터 10시까지 국어 공부하고 하루 11시간 정도 공부하는 거로 잡힌 시간표 만들어서 엄마한테 보여주고 허락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공부만 하니까 공부하기는 좋았습니다. 근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 공부만 하니까, 점점 정신이 이상해지고 불안해졌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게 맞는건가?' 하는 생각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점점 이상한 집착과 불안이 생겼습니다. 특히 수학에서 심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지만, '행렬(지금 교육과정에서는 빠졌습니다)의 곱 AB와 (AB)가 다른 건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관습적으로 알아보기 쉬우라고 괄호를 씌워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아니 같은 건데..' 뭐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불안감은 연쇄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증폭되어 갔습니다. 9월 말 넘어가고 10월 되니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나는 올해 작년보다 훨씬 공부를 많이 꼼꼼하게 했고, 그에 따라 실력이 늘었다. 따라서 내가 올해 수능을 망치면, 그건 실력 문제가 아니라 불안감에 의한 멘탈 문제에 의한 거다. 그렇다면 내가 3수를 할 때 그 문제는 더 심해질 거고, 나는 수능을 더 망치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번에 실패하면 3수도 못한다.'
거기다 자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번에 수능 망치면 자살하게 되지 않을까'와 같은 부정적인 예측이었습니다. 어떤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한 예측이 아니라 불안한 직감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지옥같이 살다가 어느 순간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망하면 어때. 이번에 수능 망하면 공부는 내 길이 아닌거니까, 기술 배워서 조선소 가야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다 보니까 방어기제가 작용한 거 같습니다. 이때부터 많이 내려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수능 망칠 거 같은데, '몸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전처럼 목숨걸고 하나하나 꼼꼼히 보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가볍게 봤어요.
물론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수능 전날에 당일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가는 길에는 비참한 느낌까지 들었어요. '못 보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못 볼 게 확실한 거 같은데'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어쨌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무시하면서 9시 반쯤 자러 갔습니다. 실제로 잠든 건 10시 반이 훨씬 넘어서였고, 4시쯤엔가 깼습니다. 다시 잠들려 했지만 1시간 정도는 잠들지 못했던 거 같고, 5시 40분쯤 일어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컨디션 최악이었죠.
1교시 언어 칠 때 역대 최악의 컨디션으로 봤습니다. 15분 남았다는 데 문제 13개가 남아 있었어요. 또 또 부정적인 생각의 연쇄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생각이 5초 내에 스쳐갔습니다.
'지금 13문제에 15분이 남았는데,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 시간이 촉박하니까 나는 더 불안해할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멘탈이 완전 나가서 13문제를 전부 다 날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언어가 70점대 4등급이 나올 거고, 나는 삼수를 해야 한다.'
인간이 정말 간사한 게, 곧 죽어도 삼수는 안 한다고 다짐했지만 시험장에서 갑자기 3수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과장 없이 '삼수'라는 단어가 모기나 파리처럼 머릿속을 날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또 5초 내로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 몰라. 삼수 하든 말든 일단 그냥 풀자.'
한 문제 찍고 다 풀었습니다. 어쨌든 비몽사몽 정신없이 풀었기 때문에 체감 등급은 언어 4등급이었습니다.
수리는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고 OMR 카드에 땀을 떨어뜨렸다는 것과 종료 15초 남기고 (찍은 문제 제외하고 푼 문제 중) 마지막 문제 마킹해서 결국 2개 찍었다는 게 기억나네요.
외국어(현 영어) 칠 때 정말 끔찍했습니다. 살면서 이 때가 가장 피곤했던 거 같아요. 누가 손가락으로 저를 옆으로 밀면 의자에 앉은 그대로 옆으로 넘어가서 쓰러질 거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시험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내가 70분을 못 버티고 시험을 포기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이 해 외국어는 역대 최악급 물로 출제되었습니다. 듣기 끝나고 3~4문제가(저는 빈칸을 맨 마지막에 풀어서 듣기 끝나자마자 빈칸 다음 문제부터 푸는 방법을 썼습니다.) 술술 풀렸어요. 신기하게도 모든 피로가 없어졌습니다. 미친듯이 정신없이 풀다가 10분 남았다는데 마지막 빈칸 3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마킹 감안해도 다 풀기에 여유로운 시간이었고, 최악의 경우에도 3문제만 날리면 되는 상황이었죠. 이 날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결론을 말하면, 수능 언/수/외 1/2/1로 모든 모의고사 중 수능을 제일 잘 봤습니다(6월 3/1/1, 9월 1/2/2). 부정적인 예측과는 정 반대였죠. 사실 부정적인 직감 자체가 근거가 없이 생긴 거였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제가 저때 처음부터 멘탈이 깨지지 않고, 항상 넘치는 의욕과 건강한 정신을 유지한 상태에서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일단 멘탈이 붕괴된 상황에서는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고 많은 것을 내려놨던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다만, 머리로는 내려놓더라도, 가능하다면 몸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냥 부담 갖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거죠. 제가 수능 당일에 멘탈이 아작난 상태에서 저 정도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결국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로 망할 거 같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공부 자체는 꾸준히 했어요. 단, 이전보다 많이 힘을 빼고 공부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도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사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당일날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규칙적으로 생활한 게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수능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 규칙적으로 거르지 않고 식사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써놓고 보니 또 또 또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글이 너무 길어졌는데, 어쨌든 제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전달이 된 거 같습니다. 참고하시고 도움 얻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 내시길 바랍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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