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 [1332076] · MS 2024 (수정됨) · 쪽지

2024-10-14 0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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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만에 훑어보는 하이데거(최종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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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갈 개념어들>

존재의 망각(Seinsvergessenheit),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 현현(Ereignis)

주거(dwelling), 사유(Ereignis), 사중구조(fourfold)

텅 빈 자리(Lichtung), 준비태세(Bestand), 포이에시스(poiesis)

포이에시스(Poiesis), 운명 지음(Destining, Geschick), 존재론적 등대(Ontological Beacons)

세속화된 신성(secularized sacredness), 다른 시작(another beginning)



안녕하세요 독서칼럼에 진심인 타르코프스키입니다.

[서론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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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eidegger/


참조 및 재구성.



(연습문제 1)

존재와 시간 이후, 하이데거의 사상은 그 자신이 "전환"(die Kehre)이라 부른 변화를 겪는다. 이 전환은 모든 것이 역전되지만, 존재와 시간에서의 입장 변화는 아니며, 오히려 동일한 근본 프로젝트와 관심사 안에서 중요한 불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는 주체성(주체로서의 인간 중심적 입장)을 포기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존재의 망각"(Seinsvergessenheit)이라는 근본 경험에서 비롯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질문을 인간 존재(Dasein)의 탐구를 통해 접근하였는데, 여기서 Dasein은 자신의 존재가 문제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기의 하이데거는 이러한 Dasein 중심의 방법론이 주체성의 오염을 가져와 존재 이해의 길을 막는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현상학적 해석학(현상과 그 해석에 대한 철학적 학문)의 프로젝트를 유지하면서도, 일상적 인간 경험의 상세한 묘사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이러한 전환 이후의 철학은 단일한 텍스트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저서와 강의, 연설에 분산되어 있어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한 전략으로 하이데거의 저서인 "철학에의 기여(Vom Ereignis)"가 주목되는데, 이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집필되었으며, 생전에 극소수의 동료들에게만 공유되었다. "철학에의 기여"는 기존의 체계적이고 해석학적인 방식이 아닌, 음악의 푸가처럼 단일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중첩시키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또한 하이데거는 독일어의 소리와 의미를 활용하여 독특한 의미의 교향곡을 만들어내어 그의 글은 난해하고 복잡한 "하이데거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존재를 정확히 표현하려는 기존 철학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에 적절히 응답하는 언어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하이데거는 존재사적 사유(Seinsgeschichtliches Denken)를 추구하며, 이는 존재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탐구하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다. "철학에의 기여"에서 두드러지는 핵심 주제들은 존재를 "현현"(Ereignis)으로 이해하는 것, "기술"(Machenschaft), "보존"(Bergung), 그리고 "신들"의 문제이다. 여기서 "현현"은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을 의미하며, "기술"은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고 대상화하는 현대 기술의 지배를 나타낸다. 이러한 주제들을 통해 하이데거의 전환 이후 사유의 일반적인 패턴이 드러나며, 이는 그의 후기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이후에 주체성의 개념을 더욱 강화하여, 인간의 일상적 경험이 존재 이해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여러 저서와 강의를 통해 강조하였다.
"철학에의 기여"는 하이데거가 생전에 여러 번 출판하여 대중에게 널리 읽힌 저서로, 그의 후기 철학을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하이데거는 후기에 독일어의 소리와 의미를 활용한 난해한 언어를 포기하고, 기존의 철학적 용어와 명료한 표현으로 존재를 정확히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현상학적 해석학"의 프로젝트를 포기한 하이데거는 일상적 인간 경험의 상세한 묘사에 더욱 집중하여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존재를 "현현"이 아닌 "기술"로 이해하고, 현대 기술의 발전을 존재의 본질적 드러남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힌트>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이후에 주체성의 개념을 포기하고자 하였으며, 인간의 경험이 아닌 존재 자체에 집중하였다.
"철학에의 기여"는 하이데거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았고, 극소수의 동료들에게만 공유되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후기에 기존 철학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독일어의 소리와 의미를 활용한 난해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해석학"의 프로젝트를 유지하면서도, 일상적 인간 경험의 상세한 묘사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존재를 "현현"으로 이해하고, "기술"은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고 대상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이는 '존재의 망각'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인간 존재를 벗어나 순수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를 강조하게 되었다.
- 하이데거는 후기 사상에서 '철학에의 기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존재와 인간, 언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집중하였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된 현상학적 해석학을 거부하고, '철학에의 기여'에서 '현현' 개념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며, 이는 존재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존재사적 사유로 이어진다.
- 하이데거는 '존재의 망각'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에의 기여'에서 '기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는 인간 존재가 기술을 통해 존재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전통적인 철학적 언어를 비판하며, 존재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언어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힌트>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니고, 후기 사상에서 '존재의 망각'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 '철학에의 기여'는 존재의 의미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들을 푸가 형식으로 중첩시켜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한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제시된 현상학적 해석학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이를 유지하면서도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기술'을 존재의 본질을 은폐하고 대상화하는 현대 기술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하이데거는 '철학에의 기여'에서 새로운 언어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존 철학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에 적절히 응답하는 언어를 모색하고자 했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존재의 망각(Seinsvergessenheit)"은 존재의 질문을 주체성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 근본적인 경험으로, 이는 인간 중심적 사고가 존재의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은 현상과 그 해석에 관한 철학적 학문으로, 후기 하이데거에 의해 일상적 인간 경험의 묘사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탐구하는 도구로 변화되었다; 마치 우리가 예술 작품을 단순히 보지 않고 그 내면의 의미를 깊이 탐색하는 것과 같다.

-"현현(Ereignis)"은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을 의미하며, 이는 존재가 독립적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마치 무대의 커튼이 열리면서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이 오는 연극적 장면으로 비유될 수 있다.



(연습문제 2)


하이데거는 존재(Being)의 본질적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 존재가 가장 근본적으로 주거(dwelling)에 있다고 보았다. 초기 저작인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 시간성(temporality)을 제시했지만, 이후 철학에서는 존재의 질문을 존재 자체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주거로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존재를 사건성(event)이나 사유(Ereignis)로 재해석했는데, 이는 인간의 세계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맥락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형은 인간의 이해 가능성의 구조를 혁신하는 것으로, 존재는 인간의 수용 능력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펼쳐나간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가 인간을 사유화(appropriation)하여 존재의 전개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주거는 인간이 세상에서 '거주하는' 방식으로, 이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는 주거를 통해 인간이 지구(earth), 하늘(sky), 신적 존재(divinities),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mortals)로 이루어진 '사중구조(fourfold)' 안에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사중구조는 자연과 문화의 통합으로서, 인간은 이를 보존하고 지켜나감으로써 진정한 주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기술(technology)의 지배로 인해 존재의 망각 상태에 빠졌으며, 이는 주거의 상실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존재의 본질적 전개에 참여하고, 사중구조의 조화로운 보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존재의 신비(mystery), 즉 우리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을 인식하게 되며, 이는 인간의 유한성(finitude)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진정한 주거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존재의 신비를 수용하며, 사중구조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유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고, 기술 중심의 현대 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도 시간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주장하며, 주거의 개념을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 하이데거는 주거를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 정의하며, 인간의 의미 부여와 이해 방식을 배제했다.
- 사중구조는 지구, 하늘, 동물들, 그리고 신적인 존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주거하지 않는다.
- 현대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고 주거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이데거는 주장했다.
- 존재의 신비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이는 인간의 불멸성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힌트>
- 하이데거는 후기 철학에서 시간성이 아닌 주거를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았으며, 주거를 핵심 요소로 간주했다.
- 하이데거는 주거를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의미 부여와 이해 방식의 총체로 정의했다.
- 사중구조는 지구, 하늘, 신적 존재,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주거한다.
- 하이데거는 기술의 지배로 인해 인간이 존재의 망각 상태에 빠졌으며, 이는 주거의 상실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 존재의 신비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되며, 이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망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사중구조에서 소외시키고, 존재의 본질적인 전개를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다.
-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을 시간성에서 주거로 바꾸면서, 존재의 의미를 인간의 내면적 경험보다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찾고자 했다. 즉, 주거는 인간 내면의 시간적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외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사건성이나 사유로 재해석하면서,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맥락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이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주거를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총체로 보았다. 인간은 주거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간다.
- 하이데거는 사중구조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극복하고,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했다. 사중구조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기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드는 방식을 경고하고 있다. 기술은 존재의 신비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인간을 존재의 망각 상태로 이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 하이데거는 시간성과 주거 개념을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지 않았다. 시간성은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 여전히 유효하며, 주거는 시간성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맥락에 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존재 자체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으며, 사건성이나 사유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의 자기-전개 과정을 나타낸다.
- 하이데거는 주거를 통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이것이 곧 인간이 주거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존재의 신비 속에서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본다.
- 하이데거는 사중구조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지만, 이것이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윤리'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의 관심은 윤리적 당위보다는 존재의 진리에 있으며, 사중구조는 이러한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주거(dwelling)"는 단순한 물리적 거처를 넘어서 인간이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총체로,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인간이 지구, 하늘, 신적 존재,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중구조' 속에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사유(Ereignis)"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를 사건성으로 재해석하는 개념으로, 이는 인간의 세계가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맥락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러한 존재의 전개는 인간의 이해 가능성 구조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사중구조(fourfold)"는 인간의 존재가 지구(earth), 하늘(sky), 신적 존재(divinities),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mortals)로 구성된 자연과 문화의 통합된 구조 안에서 실현된다는 개념으로,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인간이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연습문제 3)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이 발명하고 활용하는 도구와 기계들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일상적 관점이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이는 기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도구적이고 인류학적인 정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기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이전 개념인 '이해 가능성'을 '텅 빈 자리(Lichtung)'의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텅 빈 자리'는 존재의 영역으로서 사물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를 가지며 드러나는 공간이며, 기술의 본질을 식별하는 것은 사물들이 기술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현대 기술의 드러냄이 자연에게 에너지의 추출과 저장을 요구하는 '도전(Ge-stell)'으로 나타나며, 이는 비생물학적 자연, 식물, 동물, 인간 등을 모두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준비태세(Bestand)'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석은 아직 활용되지 않은 영역들까지 확장되어 잠재적 자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하이데거는 라인 강의 수력 발전소를 예로 들어 강을 단순한 수력 공급원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수백 년간 강을 잇던 나무 다리나 횔덜린의 시 '라인'에서 나타나는 경외와 존중의 대상인 자연과 대비된다. 기술적 드러냄은 존재자를 '비존재'로 환원시켜 경외심과 신성함을 잃게 하며, 그는 이에 대한 설명으로 '운명(Geschick)'과 '보여줌의 틀(Gestell)'의 개념을 도입한다. '운명'은 인간이 드러냄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선험적 구조이며, '보여줌의 틀'은 존재자를 준비태세로서 드러내도록 인간을 도전하는 집합으로서 기술적 드러냄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고 다른 드러냄의 가능성을 배제하며 존재의 은폐-비은폐의 역동성을 가린다. 그는 기술이 존재를 존재자로 환원시키는 형이상학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전통적 장인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포이에시스(poiesis)'를 제시한다. 포이에시스는 사물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하는 '생성'의 과정으로서, 장인은 재료의 본질에 응답하여 그것을 형성하며, 이는 사물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 그 자체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지배 아래에서 다른 드러냄의 가능성이 사라진다고 보며, 기술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거나 저주하는 대신 기술을 다르게 거주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이는 존재의 진리를 존재자들 속에서 보호하고 사중적 존재 방식(Das Geviert)의 본질적 펼쳐짐을 수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포이에시스'를 현대 기술의 지배 아래에서 기술적 드러냄의 완성으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존재를 존재자로 환원시키는 형이상학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운명'을 존재자를 준비태세로 드러내도록 인간을 도전하는 집합으로 정의하며, 이는 '보여줌의 틀'을 통해 인간이 드러냄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선험적 구조라고 본다.
- 하이데거의 '텅 빈 자리' 개념은 인간의 도구적 활용으로 인해 사물들이 의미를 상실하는 공간으로서, 기술의 본질적 드러냄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드러냄이 사물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도 그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 하이데거는 라인 강의 수력 발전소가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기술이 활용되는 긍정적 사례라고 제시한다.
<힌트>
- '포이에시스'는 기술적 드러냄의 완성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제시한 전통적 장인의 기술로서 현대 기술에 대한 대조적 개념이다.
- '운명'은 인간이 드러냄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선험적 구조이고, '보여줌의 틀'은 존재자를 준비태세로 드러내도록 인간을 도전하는 집합으로 정의된다.
- '텅 빈 자리'는 사물들이 의미를 가지며 드러나는 공간으로서 기술의 본질을 밝히는 개념이지, 의미를 상실하는 공간이 아니다.
- 현대 기술의 드러냄은 사물들을 준비태세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데, 인간의 개입 없이 본질을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것은 '포이에시스'의 특징이다.
- 하이데거는 라인 강의 수력 발전소를 자연을 단순한 자원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의 부정적 예로 들며, 이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잃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기술을 단순히 도구와 기계들의 집합으로 보는 일상적 관점을 완전히 부정하고, 기술의 본질을 '텅 빈 자리'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한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 기술은 자연을 '준비태세'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존경과 경외의 대상으로 볼 수 있도록 돕는다.
- 하이데거는 라인 강의 수력 발전소를 예로 들어, 기술이 자연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운명'과 '보여줌의 틀'을 통해 인간이 기술적 드러냄에서 벗어나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전통적 장인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포이에시스'를 현대 기술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며, 기술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술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힌트>
- 하이데거는 기술을 도구와 기계들의 집합으로 보는 일상적 관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점이 기술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적인 정의라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 기술은 자연을 '준비태세'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존경과 경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 하이데거는 라인 강의 수력 발전소를 예로 들어, 기술이 자연을 단순한 수력 공급원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한 경외와 존중의 태도를 약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 하이데거는 '운명'과 '보여줌의 틀'을 통해 인간이 기술적 드러냄에 사로잡혀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 하이데거는 전통적 장인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포이에시스'를 통해 현대 기술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기술을 다르게 거주하는 방식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지만, 과거의 기술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 "텅 빈 자리(Lichtung)"는 하이데거가 사물들이 의미를 갖고 드러나는 존재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개념으로, 이는 고전적인 기술 이해를 넘어서 기술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시도로서, 마치 예술 작품이 보는 이마다 다른 해석을 통해 다양한 의미로 드러나는 갤러리의 공간과도 같다.

- "준비태세(Bestand)"는 하이데거가 기술이 자연 및 존재를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개념으로, 예를 들어 라인 강을 아름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에너지 공급원으로만 간주하는 것과 같은 관점의 변화를 설명한다.

- "포이에시스(poiesis)"는 하이데거가 생성의 과정에서 사물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전통적 장인의 기술로서의 개념을 일컫는 말로, 이는 마치 도예가가 흙의 본질에 응답하여 도자기를 만들 때, 그 흙이 본래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과정을 상징한다.




(연습문제 4)


포이에시스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창조 과정으로, 자연을 자원으로만 취급하는 기술적 게쉬텔(enframing)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이 틀에서 지구를 구한다는 것은 단순한 생태학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론적 과업이며, 이는 지구를 그 자체의 본질로 자유롭게 하여 자연이 기술적 게쉬텔의 지배 없이 자발적이고 자기 조직적인 포이에시스를 통해 펼쳐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방은 전통적 공예품처럼 자연 재료를 조화롭게 모으는 거주(dwelling)와 장인 정신(artisanship)의 개념과 연결되며, 목재의 본질에 따라 창조를 이끌어가는 전통적인 목수의 작업에 의해 예시된다. 하늘을 하늘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낮과 밤의 주기, 계절의 변화 등 자연의 원초적 리듬과 동기화하여 기술적 진보의 끊임없는 속도로 인해 깨진 조화를 회복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동기화는 기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적 패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방식으로 통합할 것을 제안하며, 하늘이 주는 시간과 날씨의 선물을 존중한다. 24시간 인터넷 문화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는 이러한 패턴에서 벗어나 있어 이러한 재연결의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킨다. 신적 존재를 신적 존재로서 기다린다는 것은 존재의 펼쳐짐 속에서 성스러움의 도래나 부재에 대한 개방성을 포함하며, 인간이 미리 정해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 지음(destining, Geschick)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운명 지음의 개념은 숙명론적 강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 상황을 변화시킬 구원의 힘을 부여하며, 기술적 게쉬텔의 위험을 인식함으로써 이 구원의 힘은 더욱 두드러진다. 죽음을 죽음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자신의 본질적 존재로 인간을 이끄는 것은 죽음에 대한 비회피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문화적 구조에 통합하여 좋은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인간 존재에서 죽음의 역할을 진정으로 수용하는 관습과 의식을 발전시켜 필멸자로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물과 머무름은 사물들이 그 본질 속에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 즉 전통적인 장인 정신이나 시적 거주(poetic habitation)를 구현한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듯이 경작이나 건설을 통해 이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구호의 통합적 실천의 핵심이다. 이러한 예술 작품들은 기술적 명료화를 방해함으로써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하는 존재론적 등대(ontological beacons)의 역할을 하며, 인류가 존재의 신비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구호의 과업을 준비시킨다.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언에 주의 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류는 역사를 통해 부여된 선물로서의 존재를 대하는 변혁적인 학습 과정을 거치며, 세속화된 신성함을 함양하고 지구, 하늘, 신적 존재, 필멸자의 사중주 속에서의 진정한 거주의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학습 과정은 우리를 구호의 과업에 대비시켜 기술적 사고가 가려버린 존재의 신비와의 재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틀린 선택지>
1. 포이에시스는 자연을 자원으로만 취급하는 기술적 게쉬텔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2. 지구를 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공예품을 통해 기술적 게쉬텔의 활용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인간은 자신의 운명 지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기술적 게쉬텔의 지배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4. 죽음을 죽음으로서 맞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회피적 태도를 유지하고 문화적 구조에서 배제해야 한다.
5. 사물과 머무름은 기술적 명료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어 존재론적 등대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힌트>
1. 포이에시스는 기술적 게쉬텔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창조 과정이며 자연을 자원으로만 취급하지 않는다.
2. 지구를 구하는 것은 기술적 게쉬텔의 활용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기술적 지배 없이 자발적 포이에시스를 통해 펼쳐지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3. 인간은 자신의 운명 지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 게쉬텔의 위험을 인식함으로써 구원의 힘을 얻는다.
4. 죽음을 죽음으로서 맞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비회피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문화적 구조에 통합하여 좋은 죽음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5. 사물과 머무름은 기술적 명료화가 아니라 전통적 장인 정신이나 시적 거주를 통해 사물들이 그 본질 속에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틀린 선택지>
- 기술적 게쉬텔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여기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다.
- 하늘을 하늘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거부하고 원시적인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적 존재를 신적 존재로서 기다린다는 것은 운명을 거부하고 인간의 의지에 따라 미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의미한다.
- 죽음을 죽음으로서 맞이한다는 것은 죽음을 인간 존재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유한성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 사물과 머무름은 사물 본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힌트>
- 기술적 게쉬텔은 본문에서 자연을 자원으로만 취급하는 것으로 설명되며,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과는 거  리가 멀다.
- 하늘을 하늘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술 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기술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적 존재를 기다린다는 것은 인간이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죽음을 죽음으로서 맞이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죽음에 대한 문화적 의식과 관습을 통해 좋은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 사물과 머무름은 사물과의 심미적인 관계를 넘어, 전통적인 장인 정신과 시적 거주를 통해 사물들이 본질을 드러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포이에시스(Poiesis)"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창조 과정으로, 이는 기술적 게쉬텔(enframing)과 대조적으로 자연이 그 자체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목수가 목재의 성질을 따르며 작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포이에시스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운명 지음(Destining, Geschick)"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으로, 이는 기술적 게쉬텔의 위험성 인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힘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단순히 정해진 운명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존재론적 등대(Ontological Beacons)"는 기술적 명료화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도록 돕는 예술 작품들을 의미하며, 이는 인류가 존재의 신비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구호의 과업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예술 및 장인 정신을 통해 창조된 작품들이 이러한 등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연습문제 5)


하이데거는 '신'(god)이라는 용어를 때때로 세속화된 신성(sacredness)의 개념으로 사용하여, 존재(Being)의 본질적 전개 속에서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사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신을 수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세속화된 신성이란 종교적 의미의 신을 넘어선, 존재의 신비와 경외를 느끼는 감수성을 의미한다. 그의 저서 『기여들』에서 하이데거는 '다른 시작'의 궁극적 신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다른 시작'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 사유의 '첫 번째 시작', 즉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는 이 '신'이 새로운 밝힘의 장(clearing)을 열어 존재의 역사에서 변혁적 사건을 촉발하는 영웅적 인물이나 문화적 전형(template)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적 촉매는 반드시 개인일 필요는 없으며, 때로는 특정한 문화적 사건이나 사회적 힘 그 자체가 신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쨌든 하이데거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시적인 것(poetic)에 다시 눈뜨게 하고, 그리하여 '사중계'(fourfold) 안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중계'란 하늘과 땅, 신적 존재와 필멸의 인간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진 존재의 장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독일 민족이 도구적 기술(instrumental technology)의 존재 방식을 시적 거주(poetic dwelling)의 방식으로 변혁하는 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영적인 사명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는 독일어가 그리스어와 그들의 사유와의 내적 관계로 인해 유럽 사상의 기원과 이전의 비기술적 세계관에 특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존재는 언어를 통해 특정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따라서 그는 독일 민족이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나아갈 때, 나치당의 영적 지도자들이 그들을 깨우는 신적 촉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들이 기술적 사유의 대리인에 불과하며, 역사적 변혁을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대신 언어적-역사적 민족 개념을 강조하였다. 그는 언어와 문화의 역사적 전승을 통해 민족이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이는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구별된다. 그의 나치즘과의 연루는 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으나, 그의 철학적 사유 전반에 걸쳐 나치즘의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많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가 이끌어낸 사유의 거대한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철학과 정치적 입장을 비판적으로 구분하여 접근할 수 있다.

<틀린 선택지>
-하이데거는 종교적 의미의 신을 강조하며,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은 전통적인 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른 것이라 보았다.
-하이데거는 독일 민족이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통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 이념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여들'에서 '첫 번째 시작'의 신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이 새로운 존재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나치당의 영적 지도자들이 기술적 사유의 대리인이 아니라, 역사적 변혁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언어와 존재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민족의 형성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기반한다고 주장하였다.
<힌트>
-하이데거는 종교적 의미의 신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초월한 세속화된 신성의 개념으로 존재의 신비와 경외를 논하였다.
-그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언어적-역사적 민족 개념을 강조하였으며,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기여들'에서 그는 '첫 번째 시작'이 아닌 '다른 시작'의 신을 언급하며, 고대 그리스의 형이상학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하이데거는 나치당의 영적 지도자들이 역사적 변혁을 이끌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그들이 기술적 사유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실망하였다.
-그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며 언어를 통해 존재와 민족이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거부하였다.

<틀린 선택지>
- 하이데거는 '신'의 개념을 존재의 영역에 국한시키고, 신이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다는 전통적인 종교적 관점을 거부했다.
- 하이데거는 '다른 시작'을 이끌어낼 '신'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한정하고,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라고 보았다.
-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사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하이데거는 독일어가 지닌 언어적 우월성 때문에 독일 민족만이 '존재의 집'에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보았다.
- 하이데거는 나치즘의 몰락 이후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후회하고 나치즘의 이념과 자신의 철학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명확히 했다.

<힌트>
- 하이데거는 신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세속화된 신성으로 재해석하여 존재의 영역과 연결시켰다.
- 하이데거는 '다른 시작'을 이끌 '신'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으로 한정하지 않고, 영웅적 인물, 문화적 전형, 사회적 힘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 하이데거는 기술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도구적 기술에 매몰된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비판하고 시적 거주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했다.
- 하이데거는 독일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가 독일 민족만을 '존재의 집'에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민족으로 보았다는 주장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그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며,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존재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 하이데거는 나치즘 몰락 이후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분명한 해명을 내놓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과 나치즘의 연관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 글에서 얻어갈 개념 3가지>

-"세속화된 신성(secularized sacredness)"은 종교적 의미의 신을 초월하여 존재의 신비와 경외를 느끼는 감수성을 의미하며,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의 본질적 전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보았다.

-"다른 시작(another beginning)"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과 대비되는 새로운 존재의 밝힘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이는 존재의 역사에서 근본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문화적 전형을 상징한다.

-"사중계(fourfold)"는 하늘, 땅, 신적 존재, 그리고 필멸의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거주의 공간을 뜻하며, 하이데거는 이를 통해 인간이 기술 중심의 세계를 넘어 시적 거주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희망하는 주제를 던져주시면 선정해서 지문으로 제작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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