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여 [1325791] · MS 2024 (수정됨) · 쪽지

2024-10-25 2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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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어원 이야기: 염소에서 얌생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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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얌생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마 ‘얌치가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얌체'와 동의어로 알고 계실 거고, 대부분 속임수 등의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쓰죠. 


그렇지만 ‘얌생이'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물건을 조금씩 슬쩍슬쩍 훔쳐 내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도둑질이죠. 여기서 접미사 ‘-꾼(사실 이건 한자 軍이 문법화한 것)'이 붙어 ‘얌생이꾼'이 나왔지만 대부분 ‘얌생이'를 사람에게도 쓰는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 특이한 관용구가 있습니다. 아래에 보이는 ‘얌생이 몰다/치다'입니다. 



‘몰다'는 ‘어떤 대상을 바라는 처지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하다’의 뜻이니 당연히 저 ‘치다'는 ‘양치기'에 보이는 ‘가축이나 가금 따위를 기르다’의 뜻의 ‘치다'겠지요. 도둑질을 몰 수 있을까요? 좀 이상하지 않나요?


여기서 우리는 ‘염소'의 동남방언으로 ‘얌생이'가 있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염소'는 어원적으로 ‘염+소(현재는 단일어)'로 분석되는데 원래 15~16세기에는 ‘염'이라는 형태로 쓰였습니다. 중세국어 시기 ‘羔’가 ‘염 고’로, ‘羊’이 ‘염 양’으로 실린 것만 봐도 원래 ‘염소'가 아니라 ‘염'이었고, 여기에 ‘소'가 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원래 ‘염소'라는 동물을 나타내는 말은 ‘염'이었고, 여기에 ‘소'가 붙으면 ‘염소'가, 접미사 ‘-생이’가 붙으면 ‘염생이’가되는 것입니다. 이 ‘-생이/셍이'는 ‘강생이', ‘말생이', 괴생이' 등의 방언형에서 자주 보이는데 주로 동물이나 식물 뒤에 붙습니다. 


근데 어째서 ‘염생이'가 아니라 ‘얌생이'냐고요? ‘여덟'은 지역에 따라 첫 음절이 ‘여'로도, ‘야'로도 나타납니다. 보통 방언에서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건 기원적인 형태에서 서로 다른 음운 변화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ㅕ와 ㅑ가 모두 기원적인 형태를 공유한다면 그것은 쌍아래아여야 한다는 것이 종래의 의견입니다. 즉 '여덟'이 '*ᄋᆢᄃᆞᆲ(이 경우 모음조화까지 지켜짐)'으로 재구되듯이 ‘염소'의 ‘염'은 ‘*ᄋᆢᆷ’으로 재구됩니다. 이 쌍아래아는 ‘ᆝ’로도 적는데 그건 쌍아래아의 음가가 아래아 앞에 반모음 ㅣ가 붙은 발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쌍아래아가 지역에 따라 ㅑ 또는 ㅕ로 분화되었고, 제주 방언에서 아래아가 남아있듯이 쌍아래아 역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방언의 흔적으로 이기문(1972) 이래로 국어학계에서는 쌍아래아를 재구합니다. 그리고 이 ‘염' 또는 ‘얌'에 ‘-생이'가 붙어 ‘염소'를 뜻하는 ‘염생이', ‘얌생이' 등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염소'라는 동물에서 ‘도둑질'이라는 뜻으로 변하게 되었을까요? 조항범 교수는 이를 역사적 배경으로 설명합니다.  



“‘얌생이’가 ‘도둑질’과 ‘도둑’이라는 의미를 얻은 데에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해방 후 미군정 시절, 막 독립한 한국을 돕기 위한 다량의 원조 물자가 미국에서 부산 미군 부대로 들어왔다. 이 물자를 훔쳐 내다 파는 도둑이 많아 경비가 삼엄했는데, 어느 날 물자를 쌓아놓은 철망 안쪽으로 한 마리의 염소가 들어왔다. 당황한 주인은 미군 초병에게 양해를 구해 염소를 쫓아 철망 안쪽 으로 들어갔다가 물건을 슬쩍 훔쳐 나왔다. 여기에 맛을 들인 염소 주인은 계획적으로 염소를 철망 안으로 몰아넣고는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기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들통이 나 결국 철창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한다.11)


11) 이와 비슷한 유래담이 경향신문 1952년 3월 5일 자 신문 기사를 비롯하여 여러 신문 기사에 나온다.


이런 일로 해서 계획적으로 다른 일을 빙자해 물건을 훔쳐내는 것을 ‘얌생이 몰다’라고 표현하였고, 이러한 관용구의 의미로부터 ‘얌생이’에 ‘물건을 훔쳐 내는 짓(도둑질)’ 또는 ‘그와 같은 짓을 하는 사람(도둑)’이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이로써 ‘얌생이’가 등 장한 시기는 광복 후 ‘미군정기(美軍政期)’이고, 장소는 ‘부산’임이 드러난다.”


ㄴ 조항범(2018), 우리말 비속어의 어원에 대하여(1) 



이처럼 계획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걸 ‘얌생이 몰다' 즉 ‘염소를 몰다'라고 표현하게 되고, 이러한 관용구의 의미로부터 ‘얌생이'에 ‘도둑질'이라는 의미가 추가된 것이죠. 그리고 이 ‘도둑질'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한 표현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속임수를 쓰는 사람', ‘비겁한 사람’ 등의 의미도 추가되었습니다. ‘얌생이'의 ‘얌'이라는 형태와 ‘염치/얌치'의 1음절이 비슷한 점도 한몫했을 겁니다. 즉 결국 ‘얌생이'에 ‘속임수'라는 뜻이 추가된 것 역시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 



‘염소'에서 시작하여, ‘도둑질', 그리고 ‘속임수/비겁함'까지 ‘얌생이' 이 단어 정말 특이한 의미 변화를 겪은 단어입니다.




관련 기록


"이번엔 미 五五보급 창고에서 절취하다가 총에 맞아 입원 가료 중에 있는 얌생이꾼이 있다."

 「美軍物品 竊取라」(동아 일보 1952. 3. 26.)



"‘한국’ 하고 싸웠더라면 그 굉장한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도 비행기에 싣기도 전에 한국 ‘얌생이’꾼들한데 도적을 맞았을 것이라는 것 – 하긴 해방 직후 혼란기의 생활난은 소위 ‘얌생이’라는 괴상한 동물(?)들을 수없이 배출하였다."

「해방 십년의 특산물 5 얌생이」(동아일보 1955. 8. 20.)



"과거 군정 시에 있어서는 미군 및 항만 사령부 철도 경찰의 엄중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소위 ‘얌생이’이라는 절도배가 발호하여 상당한 수량의 물자가 분실되었던 것으로..." 

「外資 保管에 萬金」(동아일보 194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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