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joier [424531] · MS 2012 · 쪽지

2015-03-19 01:55:30
조회수 7,027

근 6년간 세상을 살아가며 느낀 점 - 1(고등학교 ver)

게시글 주소: https://spica.orbi.kr/0005814335

과제를 다하고 잠깐 잠들었다 일어나서 문득 든 생각 생각해보면 나 참 재밌게 살았는데, 남들에게 들려주면 어떻게 생각할까?”

글재주도 없는 내가 저러한 이유로 시작하는 두서없는 글. 태클, 질문 뭐든 환영한다. 다만 이 글은 전적으로 나의 관점에서 쓰인 글이고, 내 또래나 동생들에게 전하는 글이라 생각하고 말을 편하게 이야기하는 내 말투가 거슬릴 수 있는 점은 양해 부탁한다.

 

난 현재 22살이고, 이야기는 6년 전 중3부터 시작한다.

그 당시 나는 집안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이혼서류가 대기 중인 평범한집안에서 전교 10등 권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해 3학년 2학기 성적 350명 중 250등을 찍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3년 내내 서든(FPS) 만 했다. 덕분에 3학년 말에는 나이를 속여 랭커클랜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시즌에 어머니가 시켜 뭔지도 모르는 자사고에 지원했고 컷트라인 성적이었던 나는 강당에서 합격 공을 뽑아 운이 좋게도 자사고에 합격했다. (성적 최저기준을 넘기면 강당에서 공을 뽑아 합격/불합격을 나누는 방식)

 

아무 생각 없이 입학했고, 첫 입학고사를 본 내 성적은 250명 중 200등 이상. (정확한 성적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막연히 잘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공부에 대한 의지는 전혀 없었다. 첫 학기는 집에서 통학했는데,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갈 때마다 새벽 2시까지 싸우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으니 머릿속에는 짜증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의 퇴사.

잠시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면 건설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는 정말 정직하게 일에 열중하시는 분이지만, 일에만 열중하는,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해결해야 하는 분이다. 업무에 나태, 비리를 절대 용납 못 하는 성격에 회사 내에서 임원들은 좋아하나 직원들은 모두가 꺼리는, 거기에 가족보단 일이 우선인 워커홀릭이다. 그러다 차장의 직위에서 회장이 계열사 사장 자리를 줬고, 이후 주변의 시기와 질투에 못 이겨 3개월 만에 퇴사하셨다. 본인이 이런 대우를 받으며 일해야 하냐며.

 

뭐 이유야 어찌 됐건 우리 가족의 수입은 0이 됐다. 그 이후 아버지는 집에서 놀거나 무일푼으로 친구들 일을 도와주러 다녔고, 어머니는 위험한 수준의 우울증에 걸리셨다. 뭐 당연히 집에 있던 이혼서류가 다시 물 위로 떠올랐고,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께 소리 질렀다. “두 분 이혼하시려면 하세요. 대신 난 호적에서 파주세요. 제 가족 제가 만들어 나가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미친 헛소리지만, 그때 심정은 그랬다. 가족이 없어진다는 건 생각도 못 했으니..

 

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머니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은 미국행이었다. 그렇게 동생과 어머니는 주변에서 그렇게 힘들면 해외로 나가는 게 어떻냐라는 이야기를 듣고 딱 2달 만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동생은 중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미국으로 떠나 한국에서는 초졸이다. 동생의 학비만 아빠가 어떻게든 해결한다는 조건으로 우리가족은 이산가족이 됐다. (이때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 데, 지금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기회로 다가오는걸 보면 세상은 참 재밌는 것 같다.) 그 이후 몇 개월 더 노시던 아버지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회장 권유로 그 회사에 다시 들어가셨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원래 살던 곳은 지방이다)

 

 

이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2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매주 기숙사에서 나올 때마다 캐리어에 옷을 담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걸려 집에 도착하면 느껴지는 완벽한 적막’. 항상 집에 오자마자 모든 불을 다 켜고 티비를 큰 소리로 튼 후 빨래를 하고 밥을 먹었다. 원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나는 혼자 살며 정말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탈선을 해본 것 같다. 그렇게 방황하며 1년이 지나 2학년 겨울방학이 되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간이자 가장 값진 1.

 

카카오톡과 스티브 잡스의 바람이 불어 난 공부 따위 때려치우고 어플 개발을 하겠다고 나섰다. C언어도 모르는 고등학생이 어플을 만든다는 건 정말 겁대가리 없는 짓이었지만, 그때는 몰랐고 일단 했다. 딱 겉멋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고, Hello word나 두들기다 접었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3월이 왔다.

 

3월 첫 모의고사를 보고 담임과 면담을 하는 시간. 성적은 평균 3~4등급 내 기억으로 아마 냉정하게 지거국 정도 겨우 들어갔지 싶다. 그 면담자리에서 나는 역시 근 3년간 내가 늘 그랬듯이 정말 아무 생각없이 SKY를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담임은 면전에서 대놓고 비웃었다. 다시금 생각해보면 평균 3등급 정도 되는 놈이 저런 소리를 하면 누가 와도 비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때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만난 내 평생 가장 고마운 내 전 여자친구. 지금은 비록 헤어졌지만, 언제 떠올려도 너무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운 결정적으로 날 사람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친구다.

 

그 친구의 도움과 악바리로 공부했더니 성적이 많이 올랐다. 정말 많이 올랐다. 이과 150명 중 [110(내신)]이던 내 성적이 6[18(6월 모의) - 평균 1.5등급]이 됐다. 선생들의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3년 내내 선생들은 날 크게 터치하지 않았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전에는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문제아였다면, 6월 이후 물감을 뒤집어쓴 투명인간이랄까? (내 표현력의 한계다..) 전과 같이 나를 터치하지 않았지만, 어디서 뭘 하는지 일거수 일투족 감시하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통으로 자소서 쓰느라 날려버려 9월 성적이 평균 2등급으로 떨어졌지만, 금방 다시 올라 10월엔 전교 [10등권 10월모의] 수능에선 전교 [2평균 1등급(과탐 2과목 기준)]으로 졸업했다.

 

SKY에서 원하던 과에 붙었고, 한양대 전장 및 현재 재학 중인 학교에도 합격했다. 성적이 오른 게 운이었는지, 내가 열심히 해서였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찌 됐건 결과는 좋았고 차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재밌는 현상이 일어났다.

 

졸업하고 대학에 막 입학한 날, 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애들 신입생들 OT에 와서 강연을 해달란다. 나의 방황스토리는 어느새 스토리가 되어있고, 나는 소위 말해 레전드가 돼 있었다.(부끄럽지만 다른 단어가 안 떠오른다..) 그 날 자사고에 막 입학한 파릇한 300명의 학생들 앞에서 첫 강연을 한 이후 학교에선 별의별 행사 때마다 날 불러 강연을 부탁했다. (선생들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지만, 용돈이 쏠쏠했기도 했고 후배들이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볼 때 느꼈던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서 시간만 되면 항상 갔다.) 두 번째 강연을 위해 학교로 찾아갔을 때, 나를 1~2학년 때만 선생들은 되게 당황스러워했다. 다들 처음엔 네가 웬일이냐?’에서 재수하는 x끼가 학교에는 왜 찾아왔느냐?’ 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내 성적을 듣고 다들 악수를 청하더라.

 

그때의 그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날 무시하던 선생들이 내 성적만 보고 악수를 청하고, 자기 반 학생들에게 내가 가르친 학생이다라며 너희도 얘를 좀 본받아서 공부 좀 해라라고 할 때 느꼈던 그 미묘한 감정.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 같다. 하지만 억울하면 성공해라라는 어머니의 말이 몸으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억울하면 성공해라이말 하나는 정말 인생의 진리인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해 정말 생각도 못 한 다양한 경험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나니 점점 더 이 말에 대한 확신이 든다. 누군가 정말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모든 게 원망스럽다면 성공해라. 그러면 세상 모두가 네 편이 된다.

 

글을 짧게 끊는 감이 있다면 맞다 갑자기 다시 피곤해져서 나머지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대학 와서(수능 후) 겪은 이야기들과 함께 써보고자 한다. 모두들 귿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